2012.12.11 00:21

 

 

 

 낮에 한참을 어두운 곳에서 책만 보다 문득 바깥 공기가 쐬고 싶었다. 그래서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가 눈이 제법 쌓여있는 것을 발견했다. 눈이라... 내가 사는 이곳은 지리 특성상 비와 눈이 귀하여 쌓인 눈을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다. 그런 까닭에 그 차갑고 흰 눈이 어찌나 반갑던지... 오뉴월에 태어난 강아지가 처음으로 눈을 보는 심정이 이와 같을까.

 

 무심히 흩날리는 새하얀 눈송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성으로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감성이 요동친다. 순간의 방심은 나를 헤어날 수 없는 감정의 격류 속으로 몰아 부친다. 이윽고 온갖 혼란한 생각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나는 해묵은 생각들을 떨어버리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이성의 끈을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상 책을 붙들고 있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처럼 잡생각이 많을 때는 걷는 게 최고지.'


 오랜 경험을 통해 터득한 나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당장 걷지는 않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밤에 나 혼자만 이 황홀하고도 아름다우며 조용한 세계를 마음껏 탐닉하고 싶었다. 나를 괴롭히는 이 잡념들을 새하얀 눈밭 위에 떨구어 버리고 내 머릿속을 새하얗게 비우고 싶었다.

 

 

 밤 9시쯤이었다. L과 오래간만에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았다. L은 사회생활의 고단함을 이야기했고, 나는 앞으로 L은 가장이 될 사람이니 힘내라며 위로같지 않은 위로를 천연스레 던졌다. 그러다 오늘 밤에 미친 놈처럼 눈을 맞으며 돌아다닐거라 이야기하니, 찾아갈 여자도 없으면서 청승맞게 그러지 말라고 다그친다. 나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띤 채 그래도 가겠노라 다짐했다. 그러자 L은 제발 그 청승도 올해까지만 하라, 그리고 앞으로 좋은 날 많을 것이니 조금만 더 고생하라며 나를 격려했다. '너는 꽤 괜찮은 놈' 이라고 몇 번이나 강조하면서...


 이 차갑고 외진 세상에 나를 이렇게까지 봐주는 이가 있으니 정말 고맙고,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에 안도감마저 들었다. 나는 L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그 진심이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지만... 이립(而立)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나는 L을 알게 된 것이 20대의 가장 큰 행운이라 생각했다.

 

 

 밤 12시... 어제와 오늘의 경계인 시각. 어제도 아니고 오늘도 아닌, 어쩌면 어제일 수도 있고 오늘일 수도 있는 그런 모호한 밤 12시에 집을 나섰다.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걷고 또 걷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눈은 그친 상태였다. 밖은 쥐 죽은 듯이 고요했고, 인적도 드물었다. 나는 신천으로 향했다.



 신천에 도착하니 눈이 제법 쌓여 있었다. 답답할 때 마다 걷던 그 길이었지만, 눈 쌓인 이곳은 내가 알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풍경이었다. 하늘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그리 어둡지는 않았다. 그냥 잿빛 하늘이었다. 별도 달도 없이... 눈 쌓인 신천을 홀로 걷고 있자니, 정말 이 세상에 나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도 밟지 않은 순백의 눈을 밟고 또 밟으며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불어오는 찬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나는 모자를 덮어쓰고, 콧물을 훌쩍거리며 계속 걸었다. 걸으면서 내 마음 속의 응어리들이 해소되기를 바랐다.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만약 그러지 않았더라면 크게 달라졌을까?'


 찬바람에 쌓여있던 눈까지 날리면서 내가 지금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코 끝, 손 끝, 발 끝 등 온몸의 끝자락이 추위에 마비되는 듯 했다. 그냥 따뜻한 방에서 잠을 자든가, 책이나 읽고 있었더라면...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가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워서라도 앞을 보고 걷자고 나를 다독였다. 얼마쯤 갔을까, 길 옆에 눈사람이 둘 있었다.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은 것으로 봐서 엄마 눈사람과 아기 눈사람쯤 되는 모양이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저 둘을 빚어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 표정을 지었을까?


 모자(母子) 눈사람을 뒤로 한 채, 나는 또 걸었다. 이번에는 눈사람 하나와 눈축생(?) 하나가 눈에 띄었다. 모자 눈사람과는 달리 눈사람에 아주 공을 들인 흔적이 묻어났다. 나뭇가지로 표현한 머리숱과 인자한 미소는 보는 이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주인을 지키는 눈개는 조형미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아마도 애견인이 만든 것 같았다. 문득 이사올 때 홀로 남겨두고 온 대길이가 생각났다. 백색의 늠름한 체격에 두 귀와 꼬리를 쫑긋 세운 대길이와 그 옆에 서있는 내 모습이 떠올랐다. 늘 외로웠던 나에게 친구이자 자식같은 존재였던 대길이... 지금은 문경의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으리라.




 길가에 묵묵히 서있던 눈사람을 보고 나니 기분이 한결 상쾌해지고, 궂은 추위도 가시는 듯 했다. 걷고, 또 걷고, 계속 걷다보니 벌써 목적지에 도착해버렸다. 뻥 뚫린 이곳에 도착하니 나 혼자 세상의 주인인 느낌이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내 세상이요, 내 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곳에서 멍하게 서 있었다, 순백의 세상을 만끽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눈 위에 오롯이 남아있는 내 발자국을 보면서 내 지난 삶의 궤적들을 돌이켜보았다. 하나의 발자국은 하나의 만남이요, 하나의 발자국은 하나의 이별이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저 발자국이 하나 하나 모여 내 삶을 이루었다. 거기에는 희로애락애오욕이 있었고, 연민과 고뇌가 있었다. 아직까지 내 가슴 깊숙이 아로새겨진 발자국이 있는가 하면,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흩날리는 눈에 희미해진 발자국도 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듯 열렬히 뜨거웠던 사랑도 언젠가는 차갑게 식기 마련이다. 나 또한 저 어딘가에 발자국을 남겼던 스무살 그 당시의 나와는 확연히 달라져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내가 만끽했던 이 순백의 세상도 내일 낮이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거라는 사실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세상 어딘가에 영원토록 변치않는 이가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초심을 잃을 때 마다 찾아가 토로할 이 하나쯤은 있었으면 좋겠다.


 몇 시간 뒤면 이 조용한 밤의 세계에는 해가 찾아올 것이고, 며칠 뒤면 유유히 흐르던 저 신천도 얼어 붙을 것이며, 몇 달 뒤면 언제 추웠냐는 듯 얼어붙은 땅이 녹고 푸른 새싹이 돋아날 것이다. 그리고 매년 나는 또 이 곳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던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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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精神一到何事不成 HOGU B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