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1.13 22:21

 

 


 과거의 나에게서 편지가 왔다(뭐, 따지고 보면 내가 어딘가 구석에 처박혀 있던 걸 꺼내어 본거지만). 원래 이런 편지는 뜻이 통하는 친구 녀석들과 공모하여 서로의 편지를 한날한시에 부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녀석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성향을 띤 경상도 사내놈들이라 어쩔 수 없이 셀프 플레이를 하게 되었다. 무슨 내용을 써놓았는지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만, 개봉 전의 그 느낌은 분명히 설렘과 두려움과 흥분이 뒤죽박죽인 그런 묘한 감정? 어쨌든 이제 난 빼도 박도 못하고 서른이구나...

 

 편지 내용은 보다시피 별 내용이 없다. 날짜를 보아하니 훈련병 시절에 할 일이 없는데다가, 사회와 단절된 공간에서 받치는 감수성으로 써내려간 듯한데... 내용이 두서없고, 문장력도 형편없고, 글씨체도 형편없다(지금이라고 크게 다를쏘냐?). 게다가 편지지가 없어서 편지지 표지와 속옷의 포장용도로 사용되던 마분지에다가 글을 썼다. (ㅎㅎㅎ 좀 충격적이긴 하네.) 그래도 내가 쓴 것이기에 그 어느 것보다도 그립고, 또 친근하다. 오직 지금의 나만을 위한 편지이고, 글이므로 내게 있어서 무엇과도 비할 바 없이 소중한 것이다. 

 

 이 편지는 '나'라는 인간을 연구할 수 있는 자료이자, 오늘을 사는 내가 과거를 살고 있던 나를 대면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과학 기술력의 부재로 아직 개발되지 않은 타임머신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 할까. 다만 처음 써보는 것이라 다소 아쉬운 부분이 크게 눈에 띈다. 그렇지만 얻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 없겠지. 과거의 나는 따뜻한 심성의 소유자였다. 그는 첫인사부터 나를 눈물이 핑 돌게 한다.

 

 '잘 살고 있냐? 몸은 건강하고?'

 

- 그래, 난 잘 살고 있다. 그 때보다 몸무게는 10kg 불고, 피부 탄력은 좀 없어졌고, 여전히 듬성듬성한 수염은 조금 더 진해졌고, 좋아하는 여자들한테 몇 번 까여봤지만 너랑 크게 다른 점은 없다. 몸은 더 건강해졌지, 근육에 살이 붙으면서 벌크 업 되었거든! 

 

 그다음 내용은 과거의 내가 생각하는 현재의 내 모습들인데...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든지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으로 올바르게 살, 성취하고자 하는 일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정진하라고 당부하고 있었다.

 

- 미안, 얼추 들어맞는 부분도 있지만, 예상이 빗나간 모습이 더 많단다. 노상에서 점쟁이로 돈 벌기는 글러 먹었네, 하하하. 그렇지만 예전에 네가 했던 말들은 여전히 가슴에 새기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라. 절대 포기하지 않을게. 그리고 올바르게 살게. 물론 중간 중간에 포기하고 싶고 유혹에 흔들릴 때도 있겠지만, 꼭 지켜내리라 다짐할게! 약속한다, 정말로! 남아일언중천금이잖냐?

 

 다음 장에서는 당시 여름이라 아직 새파란 단풍잎 하나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내 감정을 싣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누군가에게 보여준다거나 들려준다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 뻔하다며 걱정하고 있었다(ㅎㅎㅎ 귀엽네). 이어서 초딩 때 읽은 '어린 왕자'의 내용 중 '길들이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썰을 풀고 있고, 마지막으로 윤종신의 'Annie' 가사가 쓰여 있었다. 아마도 그 당시에 정말 좋아했었던 애를 혼자 그리워하며 썼을 것이다.

 

- 지금까지 그 단풍잎 까맣게 잊고 있었거든, 미안하다. 시간 내서 코팅한 다음 소중히 간직할게. 그리고 그런 감성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거든? 스물아홉의 막바지에 그런 애를 또 보았거든. 그리고 그 애와 어린 왕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했었지. 솔직히 난 걔가 정말 부러웠고, 정말 마음에 들었단다. 결국 해피엔딩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두 번 다시 그런 감성을 공유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지. 그래도 내게 있어서 참으로 소중한 기억이었다. 뭐, 걔는 어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 그리고 그 'Annie'는 말이지, 결국 놓쳤다. 가사처럼 고백도 못해보고 끝났어. 딱히 그 애니 뿐만 아니라, 제2의 애니, 제3의 애니도 그렇게 끝났단다, 하하하하. 진짜 너한테 미안해해야 할 일 투성이구나. 그런데 완전히 끝나서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제1의 애니한테서 수년 만에 연락이 왔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거야, 그렇지? 만날 때는 헤어질 것을 생각하고, 헤어질 때는 다시 만날 것을 생각하라는 말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밖에 없더라. 솔직히 말해서 반갑긴 했지만, 별로 기쁘지는 않네. 사람 마음이란 게 그만큼 간사하더라고. 지금의 내 경험을 그때의 네가 알았더라면, 그처럼 아프지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지, 아픈만큼 성숙하는 거니까. 

 

 아무튼, 난 분명히 성장했다. 물론 여전히 나는 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그리고 연말에 정말 공을 들여서 10년 후의 나에게 다시 편지를 쓸 생각이다. 이번에는 사진도 한장 담아볼까? 핫하하하핫~!

 

 아! 이 얼마나 그리운 감정인가? 사랑하는 이에게서 편지를 받아도 이보다 더 그리울 수는 없으리. 나는 나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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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精神一到何事不成 HOGU BOSS